저 또한 늘 가슴 속에 사직서 대신 품고 있는 직업이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 작가인데요. 어렸을 때부터 꿈꾼 직업이기도 해요. 그리고 아직 그 꿈은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여러 회사를 거쳐 퇴사하면서 그 꿈이 조금 더 정교하게 조각되어지고 있어요. 지금은 드라마 작가보다 더 큰 IP를 만드는 크리에이터 쪽에 가까워요.
첫 회사를 퇴사했을 때는 지독한 스릴러물을 쓰고 싶었어요. 그때 아마 사람을 좀 죽이고 싶고, 세상이 싫었나 봐요. 그때 저에게 회사란 인간의 이기심을 끝없이 목격할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이기심을 나쁜 의미로 표현한 건 아니에요. 인간 자체의 본질적인 밥그릇 싸움은 스릴러 영화보다 더욱 피 튀기는 현장이잖아요. 사회초년생으로서 보이지 않는 칼싸움을 많이 목격했거든요. 그 칼 끝에 베이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하루하루 입증해내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녔어요.
두번째 회사를 퇴사했을 때는 ‘연구소’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SF를 쓰고 싶었어요. 저는 연구소에서 자료를 보기 좋게 콘텐츠로 기획하는 에디터였는데, 연구는 저에게는 SF처럼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행위였거든요. 사람들에게 응답을 추출하여 사회적 현상을 관찰한다거나, 수많은 표본들을 이리저리 묶어 규정하는 일들이 인간 군상의 결정체 같았달까요.
제가 쓴 첫 SF소설 ‘멸망의 감정’도 이 시기에 탄생했어요. 3개월 뒤에 멸망하는 세상을 앞둔 주인공들의 이야기인데요. 이 소설을 구상할 때 너무 급박해서 배경을 공들이지 못 했는데, 시간이 있었으면 저는 무조건 주인공을 연구원으로 설정했을 거예요. 연구소 이야기는 아직 제 안에서 커지고 있고, 초반부 설정은 다듬다 못해 입으로 줄줄 외울 지경이 되었어요.
연구소가 완성이 되지 못한 이유는 게으름을 비롯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요. 최근의 퇴사에서 또 다른 것으로 다듬어지는 저를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퇴사할 때 정말 제 외부 상황은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었거든요? 1년 간 공들인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엎어졌고, 거래처 담당자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임금 삭감도 있었고요. 와, 세상이 나에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괴로웠을 때 저는 퇴사를 결정했어요.
그건 도망이나 휴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어요. 환경과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다면, 내가 사업을 해봐야겠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일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끌려다니지 않고 선택해보자. 대뜸 그렇게 고민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슴 속에 사직서 대신 작가를 품고 사는 사람의 패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떤 시련과 고난을 마주해도 한 마디로 다 퉁이 되어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글이 될 테니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칼싸움, 연구 같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것들에 관심이 훅 꺼졌습니다. 치열하지 않고 그냥 재밌고 싶어요. 그렇게 쓰고 싶은 글을 여러분은 읽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시트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요즘 부쩍 친구들이 많이 퇴사했습니다. (소희, 혜진, 수정, 성희, 현지... 지금 떠오르는 것만 다섯) 그토록 절실했던 친구들이 후련하게 사직서를 내는 모습이 참 묘합니다. 모든 일들이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직장은 뭣 같은 곳이라곤 하지만, 그곳을 지나치며 만난 사람들, 경험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성장한 한 뼘, 이런 것들까지 뭣으로 제쳐버리고 싶지는 않잖아요. 퉤 하고 뱉어버리고 싶은 회사생활이지만 지나고 보면 꼭 접어두고 다시 보고 싶은 페이지가 되기도 하지요. 요란히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